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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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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조는 전한 문제와 경제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정치, 군사,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지식을 갖춘 관료였다. 그는 흉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중농억상 정책을 주장하며, 납속수작 제도를 제안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삭번 정책을 주도했으나, 이로 인해 오초칠국의 난이 발발하면서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정책은 이후 한나라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만함으로 인해 주변과의 갈등을 빚어 죽음을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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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전한)

2. 생애

조조는 문제태상장고(太常掌故)로 임명되었고, 후에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었다. 당시 태자 유계의 신임을 받았다. 곧 어사대부로 임명되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누르는 중농억상책을 견지하였으며, 흉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제후의 봉지를 점차적으로 빼앗아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저우에서 태어난 조조는 문제경제의 황실을 섬겼다. 예부의 하급 관리로 근무하면서, 문제에 의해 당시 고령이었던 학자 푸승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는 고위 관리로 불려갔다. 푸승은 이전 진나라를 섬겼던 학자(박사 博士)였으며, 진나라의 반대파 문헌 숙청 당시 ''상서''의 사본을 숨겨 부분적으로 복구했다.[4] 그러나 푸승은 너무 늙어서 강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교육받은 딸이 대신 조조를 가르쳤다.[5]

기원전 155년, 조조는 수도 장안에서 정치 경력의 정점인 어사대부 (또는 재상, 제국 고문)에 임명되었다. 어사대부는 중앙 정부의 삼공 중 하나로 가장 고위직이었다.[6] 그는 정치, 전쟁, 농업, 경제, 국경 방어 및 변방 관리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했다.[6]

2. 1. 초기 생애 및 활동

조조는 유저우 출신으로, 젊은 시절 장회에게서 형명학(법가)을 배웠다. 문제태상장고(太常掌故)로 임명되었고, 이후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어 당시 태자였던 유계의 신임을 받았다. 문제의 명에 따라 진나라 시대의 분서갱유로 쇠퇴한 상서(『서경』)를 당시 90여 세였던 복생에게 파견되어 배우기도 했다.[4] 이때 복생은 너무 늙어서 강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교육받은 딸이 대신 조조를 가르쳤다.[5]

조조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누르는 중농억상책을 펼쳤으며, 흉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또한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제후의 봉지를 점차적으로 빼앗아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는 상소를 올렸다.

문제 치세에 조조의 정책으로 유명한 것은 납속수작 제도이다. 당시 상업 발달로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농민 몰락이 두드러졌다. 그 원인 중 하나는 납세가 전납이었기 때문에, 농민이 농작물을 헐값에 팔아야 했다. 조조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곡물을 일정량 이상 납부한 자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납속수작 제도를 제안했다. 이 제도로 상인이 곡물 매입에 나서 농민의 수중에 많은 금전이 들어오게 되었다.

조조는 수도 장안에서 정치 경력의 정점인 기원전 155년에 어사대부 (또는 재상, 제국 고문)에 임명되었다. 어사대부는 중앙 정부의 삼공 중 하나로 가장 고위직이었다.[6] 그는 정치, 전쟁, 농업, 경제, 국경 방어 및 변방 관리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했다.[6]

2. 2. 경제 시기 활동

문제태상장고(太常掌故)로 임명되었고, 후에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었다. 당시 태자의 신임을 받은 조조는 곧 어사대부로 임명되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누르는 중농억상책을 견지하였으며 흉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제후의 봉지를 점차적으로 빼앗아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는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졌다.[4][5][6]

경제가 즉위하자 조조는 더욱 깊은 신임을 얻어 내사(수도 장관)가 되었다. 경제는 최고 직책인 승상 신도가의 말보다 낮은 직책인 내사 조조의 주청을 더 신뢰하여, 조조가 건의할 때는 신도가 등을 물러나게 하고 단둘이 이야기할 정도였다.

이에 분노한 신도가는 조조를 제거할 구실을 찾던 중, 조조가 관청 건물의 남쪽 벽에 낸 구멍을 발견했다. 이 벽은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의 묘 담벼락이었기에, 신도가는 묘를 훼손하는 불경죄로 조조를 죽이려 경제에게 상소했다. 그러나 조조는 신도가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경제에게 알려 불경이 아니라는 허락을 받았다. 신도가의 상소에도 경제는 이미 용서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참언에 실패한 신도가는 "먼저 저 어린 놈을 주살하고 상소했어야 했다"라고 후회하며 얼마 안 가 분사했다.

정적을 제거한 조조는 경제의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아 어사대부(부승상)가 되었다. 그러나 오만한 성격 탓에 신도가 외에도 외척 두영 등 많은 적을 만들었다. 특히 낭중에서 제나라와 오나라의 재상을 지낸 원앙은 조조를 심하게 미워하여, 원앙이 오면 조조가 자리를 뜨고, 조조가 오면 원앙이 자리를 뜰 정도였다. 조조는 어사대부가 되자 원앙을 탄핵했고, 원앙은 죄를 얻어 평민으로 떨어졌다.

2. 3. 오초칠국의 난과 죽음

晁錯|조조중국어는 중앙 정부가 그 규모를 줄이고 전한 제국 내 종속 왕국들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조율하는 데 기여했다.[2] 이러한 노력으로,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왕국의 불만을 품은 왕들이 칠국의 난을 일으켜 중앙 정부에 반역을 꾀했다.[2]

당시 제후왕들 중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자는 오왕(吳王) 유비였다. 유비는 영내에 소금과 철의 산지를 가져 독자적인 화폐 주조를 행하고, 민중에게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족했다. 또한 유방을 따라 영포 토벌에 공을 세운 경험이 있는 황족의 원로였다. 당시 황족들은 1년에 한 번 수도인 장안을 방문할 의무가 있었지만, 유비의 세자 유현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와의 말다툼 끝에 살해된 일로 유감을 품고 이 의무를 게을리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세력에 조조도 당장 손을 쓸 수 없어, 먼저 초(楚), 조(趙) 등 다른 대국의 영지를 구실을 만들어 삭감하여 그 권력을 서서히 빼앗아갔다. 제후왕 측은 당연히 경계하며 반발했고, 유비에게도 회계·예장 두 군을 삭감하겠다고 통고했는데, 이는 소금 산지로서 오(吳)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비는 반란을 결행했다.

반란군은 조조를 "군주의 측근 간신"이라 칭하며, 그를 제거하여 조정을 깨끗하게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2] 그러나 조정에서 조조와 정치적 적이었던 원앙 등은 이를 핑계 삼아 경제에게 조조를 제거하고 처형하여 이 왕들을 달래라고 설득했다.[2]

원앙은 경제에게 직접 면담하여 반란군을 진압할 계책이 있다고 말하고, 조조를 포함한 모든 조정 대신들을 물러나게 한 후에 아뢰었다. 원앙의 계책은 반란군이 군주의 측근 간신이라고 칭하는 조조를 죽이면 반란군의 명분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경제는 하나의 방책으로 이를 허락했다.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는다(刑不上大夫)"(『예기』)라는 말처럼 당시에는 사대부 계급의 사람에게는 형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수도 장안의 중위에게 속아 시장으로 끌려가 요참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일족도 모두 몰살당했다.[2]

이 처형 몇 달 전, 조조의 아버지는 삭번(지방 제후의 세력 약화)에 집착하는 조조를 간하기 위해 고향에서 상경했다. 조조는 "삭번을 하지 않으면 황제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종묘도 불안해진다"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유씨(황실)는 안전하겠지만, 조씨는 멸망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떠날 테니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결국 아버지의 지적대로 된 것이다.

3. 사상 및 정책

문제태상장고(太常掌故)로 임명되었고, 후에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었다. 당시 태자의 신임을 받은 조조는 곧 어사대부로 임명되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누르는 중농억상책을 견지하였으며 흉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제후의 봉지를 점차적으로 빼앗아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는 상소를 올렸다.[1]

기병의 서한 왕조 도자기 모형


한나라 시대의 쇠뇌의 청동 유물


조조는 한나라 군대가 북쪽의 유목 민족인 흉노에 맞서 기병 중심의 군대를 갖추어야 한다고 황제 문제에게 제안했다.[7] 그는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공격한다'는 정책, 즉 항복한 흉노 기병을 한나라 군대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옹호했다.[8]

가의와 마찬가지로 흉노와의 ''화친'' 결혼 동맹과 조공 조약을 지지했지만, 흉노가 ''화친'' 협정을 여러 차례 위반하고 무시했기 때문에 실용적인 이유로 반대했다.[9] 한무제 시대의 마읍 전투 이후 ''화친'' 조약이 폐지되고 한-흉노 전쟁의 공격적인 군사 전략이 채택되었다.

기원전 169년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 "변경을 수비하고 국경을 보호하라"에서 조조는 흉노와 한나라의 전투 전술을 비교했다.[10] 흉노 기병은 더 나은 지형에 적합하고, 뛰어난 종마와 기마 궁술 능력을 가졌으며, 혹독한 기후에 더 잘 적응했지만, 평탄한 평원에서는 한나라 보병과 전차가 우세하고, 한나라의 철 갑옷과 무기가 흉노의 가죽 갑옷과 나무 방패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했다.[11] 또한 중국의 복합 쇠뇌연노가 흉노의 복합 활보다 우월하며, 보병 전술에 훈련되지 않은 흉노는 한나라 보병에게 궤멸될 것이라고 믿었다.[11]

역사가 장춘수(Chun-shu Chang)는 조조가 기원전 169년에 황제에게 올린 변방 개발 및 관리 건의안을 요약했고, 문제는 조조의 제안을 승인했다.[12]

기원후 2년 한나라 제국 지도. 조조 시대보다 확장되었고, 하서 회랑의 국경 행정 구역은 둔황까지, 대원까지 충성스러운 조공국들이 있었다.


동한 왕조(22–220 AD) 도기 망루 모델. 한나라의 변방 감시 초소와 요새에 세워졌을 것이다.


조조의 건의안은 다음과 같다.

  • 변경 지역에 영구 거주민 정착: 이주민에게 집과 토지 제공.
  • 성벽 도시 건설: 높은 벽, 깊은 해자, 투석기, 가시 등으로 보호. 최소 1,000가구 수용.
  • "모래밭" 설치: 외벽 지역 주거 지역에 설치하여 밤에 적 침입 감지.
  • 이주민 지원: 도착 전 집, 농기구, 겨울/여름 옷, 음식 제공.
  • 짝 찾기: 남편/아내 없는 이주민에게 짝 제공.
  • 약탈 방지 보상: 흉노 약탈 막은 사람에게 보상, 재산 절반 수여.
  • 징집 대상: 죄수, 사면된 죄수, 노예, 평민. 작위 수여, 가족 세금/역역 면제.
  • 변경 공동체 건설: 지역 뿌리, 긴밀 연결, 상호 지원, 군사적 연합.[13]


조조는 나중에 제안을 수정했고, 문제는 이를 채택했다.[14] 수정안은 다음과 같다.

  • 변경 도시 위치: 수자원, 양질 경작지 풍부한 곳.
  • 집 구조: 침실 2개, 거실 1개, 가구/기기 완비. 거실에 나무 심기.
  • 의료/종교 지원: 의사, 무당 고용.
  • 조직 구성: 5가구('오'), 10개 '오'('리'), 4개 '리'('련'), 10개 '련'('이'). 각 지도자 선발.
  • 군사 훈련: 유능한 남자, 평시 지역 부대 지도자 밑에서 훈련, 집단 전투.
  • 이주 제한: 정부 허가 없이 지역 이탈 금지.[15]


조조의 상소문은 곽거병이 하서 회랑의 흉노군을 섬멸한 후 무제 치하 조정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한나라는 란저우에서 옥문관까지 식민지화, 타림 분지와 중앙 아시아의 서역으로 가는 길을 제공했다.



조조는 농민에 대해서는 우려를, 상인 계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 농민에게 부과된 무거운 세금과 요역 의무로 인해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지적했다.[16] 사마천은 ''사기''에서 무역으로 부유해진 상인들이 토지에 투자하여 엘리트 토지 소유 계급에 합류했다고 언급했다.[17] 조조는 정부의 반상인 정책이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과도한 농민 세금으로 인해 농민들이 토지에서 쫓겨나고 상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고 비판했다.[18]

도쿄 대학교 명예교수 니시지마 사다오는 조조의 상소문에 대해 "전한 시대 농부와 상인의 삶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며, 가혹한 세금은 전자를 빈곤하게 만들고 후자를 부유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라고 썼다.[17]

3. 1. 중농억상 정책

문제태상장고로 임명되었고, 후에 태자가령이 되었다. 당시 태자의 신임을 받았다. 곧 어사대부로 임명되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누르는 중농억상책을 견지하였으며 흉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18] 그리고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제후의 봉지를 점차적으로 빼앗아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조는 농민에 대해서는 우려를, 상인 계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16] 조조는 농민들에게 부과된 무거운 세금과 요역 의무에 대해, 성인 남성 두 명(노동 가능)을 포함한 평균 5명의 농가 구성원은 최대 100 ''무'' (4.57ha 또는 11.3acre)까지 경작할 수 있으며, 대략 100 ''시'' (2000L)의 곡물을 생산하지만, 기근과 가뭄이 발생하면 국가의 높은 세금으로 인해 농민들은 고금리 대출을 받아 빚, 빈곤, 강력한 토지 소유 가문에 대한 새로운 의존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16]

역사가 사마천은 그의 저서인 ''사기''에서 무역으로 부유해진 성공한 상인들은 종종 자본을 토지에 투자하여 엘리트 토지 소유 계급에 합류했다고 언급했다.[17] 조조가 분명히 밝히듯이, 정부의 반상인 정책은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과도한 농민 세금은 그들을 토지에서 쫓아내고 상인들이 들어서게 했다.[18]

조조는 다음과 같이 농민과 상인의 삶을 대조하며, 가혹한 세금이 농민을 빈곤하게 만들고 상인을 부유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 요즘 5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농가에서는 적어도 두 명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합니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면적은 100 ''무'' [11.3acre]를 넘지 않으며, 수확량은 100 ''석'' [약 2000L]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농민들은 봄에 밭을 갈고, 여름에 잡초를 뽑고,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합니다. 그들은 덤불과 나무를 베어 연료로 사용하고 정부에 노동력을 제공합니다. (중략) 상인들이 농부를 대신하고, 농부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부랑자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18]

도쿄 대학교 명예교수인 니시지마 사다오는 이 구절에 대해 "전한 시대 농부와 상인의 삶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며, 가혹한 세금은 전자를 빈곤하게 만들고 후자를 부유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라고 썼다.[17]

문제 치세에 조조는 납속수작 제도를 제안했다. 당시에는 상업이 활발해져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농민의 몰락이 두드러졌다. 그 원인 중 하나는 납세가 모두 전납이었던 것으로, 이로 인해 납세기가 되면 농민이 일제히 농작물을 돈으로 바꾸기 때문에 매우 심한 매수자 시장이 되어 상인에 의해 싸게 매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조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곡물을 일정량 이상 납부한 자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이 납속수작 제도로 인해 상인이 작위를 구하여 곡물 매입에 나서 농민들의 매도자 시장이 되어 농민의 수중에 많은 금전이 들어오게 되었다.

3. 2. 흉노 정책

조조는 한나라 군대가 북쪽의 유목 민족인 흉노에 맞서 기병 중심의 군대를 갖추어야 한다고 황제 문제에게 제안한 최초의 신하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여전히 주로 보병이었고, 기병전차는 지원 역할을 했다.[7] 그는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공격한다'는 정책, 즉 항복한 흉노 기병을 한나라 군대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옹호했는데, 이는 결국 채택되었다. 특히 한나라의 변경에 거주하는 여러 유목민들의 종속 국가가 설립되면서 더욱 그랬다.[8]

그는 가의 (기원전 201–168년)와 마찬가지로 흉노와의 ''화친'' 결혼 동맹과 조공 조약을 초기에 지지했지만, 가의와는 달리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9] ''화친'' 협정은 한나라와 흉노 사이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조조는 ''화친'' 협정이 흉노에 의해 여러 차례 위반되고 무시되었다고 보았다. 흉노 부족과 씨족 지도자들이 한나라의 국경을 따라 끊임없이 약탈했기 때문에, 그 조약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효력을 잃었다고 생각했다.[9] 한무제 (기원전 141–87년) 시대의 마읍 전투 (기원전 133년) 이후에야 비로소 ''화친'' 조약이 폐지되고 한-흉노 전쟁의 공격적인 군사 전략이 채택되어 흉노 제국을 붕괴시키게 되었다.

기원전 169년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 "변경을 수비하고 국경을 보호하라"에서 조조는 흉노와 한나라의 전투 전술의 상대적인 강점을 비교했다.[10] 그는 흉노 기병이 더 나은 지형에 더 적합하고, 더 뛰어난 종마와 기마 궁술 능력을 가졌으며, 혹독한 기후에 더 잘 적응했다고 보았다.[11] 그러나 평탄한 평원에서는 한나라 보병과 전차가 우세하고, 한나라의 철 갑옷과 무기가 흉노의 가죽 갑옷과 나무 방패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했다.[11] 또한 중국의 복합 쇠뇌연노가 흉노의 복합 활보다 우월하며, 보병 전술에 훈련되지 않은 흉노는 한나라 보병에게 궤멸될 것이라고 믿었다.[11]

역사가 장춘수(Chun-shu Chang)는 조조가 기원전 169년에 황제에게 올린 변방 개발 및 관리에 대한 건의안의 주요 내용을 요약했다. 문제는 조조의 제안을 승인하고 북방 변경의 군역에 사람들을 징집했다.[12] 조조의 건의안은 다음과 같다.

  • 변경 지역에 영구적인 거주민을 정착시켜야 한다. 이주민들에게 집과 토지를 제공해야 한다.
  • 높은 벽, 깊은 해자, 투석기, 가시 등으로 잘 보호되는 성벽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 각 도시는 전략적 요충지와 주요 간선 도로를 따라 최소 1,000가구를 수용하도록 설계한다.
  • 외벽 지역의 각 주거 지역은 밤에 적의 침입을 감지하기 위해 "모래밭"(t'ien-t'ien, "천국의 밭")으로 둘러싸여야 한다.
  • 이주민들이 도착하기 전에 집을 짓고 농기구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이주민들이 자립할 때까지 겨울과 여름 옷과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
  •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이주민들을 위해 짝을 구해줘야 한다.
  • 흉노의 약탈을 막은 사람에게 보상을 하고 적에게서 되찾은 재산의 절반을 수여해야 한다.
  • 일반 죄수와 사면된 죄수를 먼저 징집하고, 다음으로 주인에게 귀족 작위를 사기 위해 받은 노예를 징집하고, 다음으로 가기를 원하는 모든 평민을 징집한다. 이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그들의 가족은 세금과 역역 의무에서 면제해야 한다.
  • 지역에 뿌리를 두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상호 지원하며, "야만인"에 맞서 군사적으로 연합된 변경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13]


조조는 나중에 그의 제안에 몇 가지 수정안을 추가했고, 문제는 이를 채택했다.[14]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되었다.

  • 변경 도시는 수자원과 양질의 경작지가 풍부한 곳에 위치해야 한다.
  • 각 집은 침실 두 개와 거실 하나를 갖추고 가구와 필요한 기기로 완비되어야 한다. 거실에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 각 새로운 변경 정착지에 이주민들의 의료 및 종교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 의사와 무당을 고용해야 한다.
  • 조직에서 5가구가 '오'(wu)를 구성하고, '오장'(wu-chang, 5가구 단위의 책임자)이 이끌게 된다. 10개의 '오'는 '리'(li, 구)를 구성하고, '가시'(jia-shih, 구장)가 이끌게 된다. 4개의 '리'는 '련'(lien, 대)을 구성하고, '가오파이'(jia-wu-pai, 500명의 책임자)가 이끌게 된다. 10개의 '련'은 '이'(i, 시)를 구성하고, '가후'(jia-hou, 치)가 이끌게 된다. 각 지도자는 가장 재능 있고, 유능하며, 지역 상황에 익숙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주민 중에서 선택되어야 한다.
  • 모든 유능한 남자는 평시에는 지역 부대 지도자 밑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이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집단으로 싸워야 한다.
  • 모든 이주민은 정부의 허가 없이 자신의 지역을 떠나는 것이 금지되어야 한다.[15]


조조의 상소문은 그의 장수 곽거병 (140–117 BC)이 하서 회랑에 거주하는 흉노군을 섬멸한 후 무제 치하의 후기 조정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한나라는 란저우에서 옥문관에 이르는 이 지역을 식민지화했는데, 이 지역은 타림 분지와 중앙 아시아의 서역으로 가는 길을 제공했다.

3. 3. 제후왕 정책

문제태상장고(太常掌故)로 임명되었고, 후에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었다. 당시 태자의 신임을 받은 조조는 곧 어사대부로 임명되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누르는 중농억상책을 견지하였으며 흉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제후의 봉지를 점차적으로 빼앗아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는 상소를 올렸다.[1]

高帝初定天下,諸弟年少,兒子弱,乃封同姓為諸侯王。今吳國有五十餘城,楚國有四十餘城,膠東、膠西、淄川亦各數十城,割天下泰半以與之。今吳王知陛下即棄捐其身,有背畔之心,臣請削之。|고제초정천하,제제년소,아자약,내봉동성위제후왕。금오국유오십여성,초국유사십여성,교동、교서、치천역각수십성,할천하태반이여지。금오왕지폐하즉기연기신,유배반지심,신청삭지。중국어

今削之亦反,不削之亦反。削之,其反亟,禍小;不削,其反遲,禍大。|금삭지역반,불삭지역반。삭지,기반극,화소;불삭,기반지,화대。중국어

경제 즉위 후 조조는 내사(수도 장관)가 되었다. 경제는 승상 신도가보다 내사인 조조를 더 신임하여, 조조와 단둘이서 이야기할 정도였다.[1]

이에 분노한 신도가는 조조를 제거하려 했다. 조조가 관청 건물의 남쪽 벽에 낸 구멍이 유태공의 묘를 훼손하는 불경에 해당한다고 상소했지만, 조조는 경제에게 미리 허락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신도가는 "먼저 저 어린 놈을 주살하고 상소했어야 했다"라고 후회하며 얼마 안 가 분사했다.[1]

정적을 제거한 조조는 경제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져 어사대부(부승상)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오만한 성격 탓에 두영 등 다수의 적을 만들었다. 원앙은 조조를 심하게 미워하여, 서로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조조는 어사대부가 되자 원앙을 탄핵했고, 원앙은 평민으로 떨어졌다.[1]

전한은 전국을 직할령과 제후왕 봉지로 나누어 다스리는 군국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문제 때 국력이 증대하면서 제후국의 국력도 함께 커져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다. 가의는 이 점을 지적하며 대책을 요구했지만, 문제는 무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경제는 준비가 갖춰졌다고 판단하여 조조를 시켜 제후왕 대책에 나섰다.[1]

당시 제후왕 중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자는 오왕 유비였다. 오나라는 영내에 소금과 철 산지를 보유하여 독자적인 화폐 주조도 행했으며,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족했다. 유비는 과거 유방을 따라 영포 토벌에 공을 세운 황족의 원로였다. 황족들은 1년에 한 번 수도 장안을 방문할 의무가 있었지만, 유비의 세자 유현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와 말다툼 끝에 살해된 일로 유감을 품고 이 의무를 게을리했다.[1]

조조는 거대한 세력을 가진 유비에게 당장 손을 쓸 수 없어, 먼저 초, 조 등 다른 제후왕들의 영지를 삭감하여 권력을 서서히 빼앗아갔다. 제후왕들은 경계하며 반발했고, 유비에게도 회계·예장 삭감을 통고했다. 이 지역은 소금 산지로 오나라에 필수적인 곳이었고, 이를 계기로 유비는 반란을 결행했다.[1]

4. 평가

조조는 오만함으로 주변과 갈등을 빚어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억상 정책, 제후왕 대책 등은 이후 한나라에서도 답습된 정책이며, 그 행동은 모두 경제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4]

한편, 궁정 권력의 절대화는 환관이나 외척이 궁정을 장악했을 때 이를 억제할 세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전한 쇠퇴의 원인이 조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4]


  • 황제나 실권자의 개성에 크게 좌우되는 정치
  • 외척과 환관의 전횡
  • 억상 정책에 따른 경제 쇠퇴로 인한 재정 악화
  • 밀고 사회화에 따른 법 불신과, 부당하게 죄에 몰린 자들이 도적을 형성


조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앙도 훗날 양왕 유무(경제의 동생)가 제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으라고 경제에게 강력히 간언했다. 이 때문에 유무의 원한을 사서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사기』에서는 원앙과 조조를 같은 권에 수록하고 있으며, 『한서』에서도 이를 답습하고 있다.[4]

참조

[1] 문서
[2] 서적
[3] 서적 Representations of Childhood and Youth in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문서
[20] 서적 한서 권49 원앙조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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